항구도시인 시드니에는 페리를 이용해 쉽게 갈 수 있는 비치들이 많은데요
대표적인 곳이 지난 번에 포스팅한 서퍼들의 천국, 본다이 비치와
이번에 소개할 맨리 비치입니다.
맨리 비치로 가는 페리는
써큘라 퀴 와프에서 1시간에 한 대 정도가 있고
소요 시간은 30분이예요.
제가 이 곳에 갔던 12월초에 시드니 날씨는
변덕스럽기가 정말 팥죽 같더라고요.
아침에 나설 때만해도 햇빛이 쨍쨍하더니 어느새 흐려지고
잠시 해가 나왔다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고...
이 날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온종일 종잡을 수 없는 날씨 탓에
길을 가다 여러번 멈춰서야 했어요.
맨리 비치는 워낙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지라서인지
선착장 출구에서부터 식당과 마트가 양옆으로 즐비하게 늘어서있고
편의 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어요.
비치지만 트래킹 코스도 잘 닦여져 있어서
해안을 끼고 걷는 코스는 물론, 숲길을 지나는 구간
짧은 시간 동안 걸을 수 있는 구간, 다소 긴 시간이 소요되는 구간 등
아주 다양한 코스들이 있지요.
선택의 폭이 너무 넓어 결정 장애를 겪던 저는
어디로 가야할 지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일단은 비치쪽으로 가보기로 했어요.
시드니에 와서 처음 트래킹을 다닐 때만 해도
가기 전에 안내도를 보면서 모의 주행?을 해보고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다녔는데
어느 날인가부터 그냥 걷게 되더라고요.
어차피 길은 다 통하게 마련이고
때론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들어주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거든요.
비치 쪽으로 길을 가다보니 이렇게 장대한 나무들이
해변 가에 심어져있었어요.
이 날 날씨가 너무 흐리고 파도도 높아서 서핑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는데
해안을 따라 이어진 길을 걷는 짧은 동안에도
하늘이 일순간에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시시각각 달라지던 날씨와 하늘이 심상치않던 중에
해변가 산책로 앞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더라고요.
다행히 바로 앞에 카페가 있길래
가던 길을 멈추고 카페 앞 테라스에 앉아 롱블랙을 마셨지요.
커피를 마시는 동안에도
빗방울이 굵어졌다 잦아들었다
날이 환해졌다 어두워졌다 했는데
그게 또 나름 신비감있고 운치 있어서
눈앞에 펼쳐진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봤어요.
그 때 제 눈길을 사로잡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카페 앞 해변 벽?에 걸터앉아 있던 이 여성분과
그녀와 일행인 듯 굵은 빗방울 속에서 여전히 서핑을 즐기는 서퍼들이요.
그 분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자유를 느끼는 방식이나 삶을 견디는 방식은
사람마다 제각각 무척이나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들에 대해 파도가 저렇게 거센데 이런 날 서핑을 왜 하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이런 날씨에 왜 기를 쓰고 혼자 걸어다니는지 저를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도 있을테니
과연 누가 누구를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그러면서 신영복 선생님이 말씀하신 "인간 관계의 최고 지향은 공감"이라는 말이 떠올랐어요.
서로의 행동에 대해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누구에게나 삶을 견뎌내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쉽게 공감할 수 있을테니까요.
그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비도 멎었고
다시 길을 나서서 걷다보니 이렇게 근사한 락풀이 나타났어요.
수영장 처럼 안전하면서도 바다를 바라보면서 바닷물로 수영할 수 있는 락풀.
시드니 비치쪽에 가면 자주 볼 수 있으니
기회가 되면 꼭 한 번 락풀을 이용해 보세요.
이 쪽 지역이 특히 자연 보존에 신경을 쓰는 건지
아니면 그만큼 많이 파괴되었다는 방증인지 모르겠지만
해안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니
이 곳에 살고 있거나 희귀해진 생물들의 조각상들이 이어졌어요.
조각들을 구경하면서 걷다보니
어느새 셜리 비치
작고 아기자기한 느낌의 비치인데
이 곳을 지나 언덕을 오르니 전망대가 있더라고요.
아래를 내려다보기도 하고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본 후 이어지는 길로 계속 걸었지요.
이 부근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제법 있었는데
숲길로 들어서면서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더라고요.
살짝 불안했는데 다행히 저 앞에 혼자 걸어가는 여성 분이 보이길래
안심하고 따라갔어요.
그런데 갈림길에서 그녀나 나나 도무지 어디로 가야할 지 몰라 헤매다보니
자연스럽게 대화가 시작되었고 동행이 되었어요.
제 짧은 영어로 알아낸 그녀의 신상 명세는
그녀는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 미국인인데
출장 차 시드니에 온 남편과 함께 일주일간 여행중이래요.
그녀의 남편은 낮엔 일을 해야하기때문에 낮에는 그녀 혼자 시간을 보내는데
이런 숲길쯤은 하나도 무섭지 않다고 말할 만큼 트래킹을 좋아하는 용감한 여자였어요.
하지만 그녀에 대해 제가 느낀 가장 큰 놀라움과 경외감은
제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 하는 그것을 그녀는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사실이었는데요
그것은 바로~
배암!!!
우리 둘이 다정하게 산길을 오르는데
한쪽 구석에 갈색 뱀이 떡하니 또아리를 틀고 있었어요.
너무 놀라 발걸음이 절로 멈춰진 나와
나 만큼이나 놀라 꼿꼿하게 경직된 뱀과는 달리
그녀는 귀엽다!!!며 조심스레 다가가 뱀의 독사진을 찍더라고요.
뱀의 머리 모양을 보니 둥그스름한 게 독사는 아닌 게 분명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그 징그러운 뱀을 저렇게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볼 수 있다니...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 길을 가는데 이번엔 도마뱀이 불쑥 나타났어요.
레인코브 국립공원에서 봤던 것 만큼이나 커다란 그 도마뱀을
그녀는 마치 아이가 잠 든 모습을 바라보는 엄마처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더군요.
동물들을 좋아하냐고 했더니 정말 사랑한다며
천진하게 웃었어요.
그야말로 두리틀 박사도 울고갈 동물 애호가.
레인코브 국립공원에 가면 이런 아이들 천마리라도 볼 수 있으니
꼭 가보라고 추천해주고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영어가 짧아 패스~
이러다가 곧 저 멀리 호수 비슷한 곳에서
악어도 몇 마리 나오는게 아닐까 걱정될 무렵
다행히 우리의 여정은 끝이 났고
길이 끝난 곳에서 우리는 "We did it."을 함께 외쳤어요.
그리고 와프까지 함께 걸어오면서 되는대로 대화를 나눴지요.
이번 호주 여행에서 제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언어는 문법적으로 완전하게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말만 통하면 된다는 사실이예요.
예전엔 머릿 속으로 미리 문법 오류를 체크하면서 말을 하려니
말이 머릿 속에서만 맴돌뿐 밖으로 터져 나오지 않았는데
이번 여행에선 '니가 알아들으면 다행이지만
못알아들어도 그건 니 한국말 실력이 부족한 걸
내가 영어로 혼자 메꾸려니 그런거니까 니가 이해해라
그나마 내가 이 정도 영어를 하니 우리가 대화할 수 있는 거니까 감사하고...'
물론, 실제로 그렇게 말한 건 아니지만ㅋ 이런 자세로 대화를 하니 한결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다만 말이 자주 막히고 더듬게 되는 것 까지는 어쩔 수 없었지만
단어 몇개에 손짓, 발짓이면 기본적인 대화는 어쨌든 통한다는 깨달음은
제게 큰 용기를 주었지요.
우리 화제는 그야말로 중구난방이었어요.
한국 날씨에서부터 얼마 전 캘리포니아에서 있었던 대형 산불을 비롯헤
시드니 여행에 대한 것 등등
역시나 그녀는 모험을 사랑하는 여행자답게 이 날 저녁에
남편과 시드니 하버브리지 크라이밍을 하기로 했다며
너무 재밌을 것 같다고 기대가 크더라고요.
돈을 준다고해도 그 높은 곳엘, 그 이상한 옷을 입고 올라갈 맘이 없는 저로선
1인당 20만원 넘는 돈을 주고 그 고생을 사서 한다는 그녀가 심히 존경스럽기까지~
그렇게 와프까지 걸어오는데 어떤 세탁소 앞에서
무슨 일때문인지 몹시 열 받은 어떤 아저씨가 웃옷을 벗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자기 웃옷을 막 터는 시늉을 하고 있었어요.
기가 막혀 웃는 나와는 달리 그녀는 진심 공포에 질린 표정.
사람마다 자유를 느끼는 포인트 만큼이나
공포를 느끼는 대상 역시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이번엔 내가 그녀를 안심시켰어요.
하지만 생각해보면 정말 무서운 건 역시 사람이지요.
동물은 자기 보호 본능에 의해서만 공격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타인에게 얼마든지 폭력적일 수 있으니까요.
어색할 것 같았지만
하나도 어색하지 않게 우리는 와프까지 걸어왔고
유감스럽게도 목적지가 달랐던 관계로
거기서 서로 다른 배를 타며 자연스럽게 안녕을 고했어요.
그녀와 헤어져 페리를 타고 오며
저는 이번 여행에서 길 위에서 만난 인연들에 대해 생각했어요.
죽는 날까지 다시 만날 일이 없을,
설령 다시 만난다고 해도 이미 얼굴조차 희미해진 그녀를 비롯해
이번 여행에서 스쳐간 많은 사람들.
아주 잠깐이지만 길 위의 동반자가 되어
내게 길을 계속 갈 수 있는 용기를 주고 동행이 되어준 그들은
어쩌면 먼 곳에서부터 내게 보내진 선물일지도 모르지요.
그들이 내게 고맙고 좋은 기억으로 남은 것처럼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기억으로 남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2018/04/30 - 길에서 길을 묻다 3 - 도마뱀들의 천국 <레인코브 국립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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